[평가의 재발명 ④] AI가 잘 평가하는 것일수록, AI가 먼저 가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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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소개 — 우리는 왜 사람을 평가하는가. 이 시리즈는 평가 제도를 더 잘 만드는 법을 다루지 않는다. 평가라는 제도가 애초에 무엇을 하려고 태어났는지, 그리고 그 목적이 지금도 유효한지를 다섯 편에 걸쳐 되짚는다.
100년 된 격언이 드디어 가능해 보이는 순간
1편에서 다룬 그 문장을 다시 꺼내야겠다. 측정할 수 없으면 관리할 수 없다.
지난 100년간 이 말에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었다. 측정할 도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관리자가 볼 수 있는 건 결과물과 몇 번의 회의뿐이었다. 그래서 평가는 연말에 기억을 더듬어 쓰는 서류로 남았다.
AI는 그 한계를 없앤다. 키보드를 몇 번 눌렀는지, 메일에 몇 분 만에 답했는지, 문서를 몇 번 고쳤는지, 회의에서 몇 분 말했는지. 예전에는 볼 수 없던 것들이 지금은 초 단위로 집계된다. 드디어 다 잴 수 있게 된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다.
그리고 많은 회사가 정확히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지금 실제로 벌어지는 일
미국의 경제 연구기관 Equitable Growth 조사에 따르면, 컴퓨터로 생산성을 촘촘히 감시당하는 노동자일수록 불안을 더 많이 호소했다. 스스로 안전하다고 느끼는 속도보다 빨리 일해야 한다는 압박도 컸다. 지난 1년간 다친 비율도 높았고, 특히 심리적 치료나 휴직이 필요한 병이 많았다.
알고리즘으로 사람을 관리하는 방식을 다룬 학계 연구들도 대체로 같은 결론에 닿는다. 관리 효율은 올라가지만, 그 이득을 자율성과 건강에서 빼 오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 시리즈의 틀을 대보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선명해진다.
AI는 분배와 선별에만 힘을 실어준다. 성장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측정한 수치는 등급이 되고, 등급은 연봉과 저성과자 명단으로 이어진다. 반면 성장에 필요한 정보는 애초에 숫자가 되지 않는다. 이 사람이 어떤 동료와 일할 때 살아나는지, 어떤 영역을 어려워하는지, 왜 그 결정을 내렸는지. 이런 건 기록에 남지 않는다.
2편에서 성장이 항상 진다고 했는데, AI가 들어오면 그 격차가 좁혀지는 게 아니라 더 벌어진다. 잴 수 있는 두 가지만 무기를 얻기 때문이다.
그런데 측정되는 것일수록 먼저 사라진다
여기에 모순이 발생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연구진이 20만 건의 실제 대화 기록을 분석해, 직업별로 AI가 얼마나 쓰이는지를 측정한 연구가 있다. 결론은 명확했다. 정보를 모으고, 글을 쓰고, 설명하고, 알려주는 일에서 AI가 가장 많이 쓰이고 가장 잘 해낸다는 것이다. (지식 노동자!)
문장 하나로 정리하면 이렇다. 지금 성과 평가가 재고 있는 것들이, 정확히 AI가 가장 먼저 가져가는 것들이다.
문서를 몇 개 썼는지, 티켓을 몇 개 닫았는지, 얼마나 빨리 처리했는지. 회사가 이 지표들을 정교하게 다듬는 동안, 그 지표가 가리키는 일 자체가 기계로 넘어간다. 곧 없어질 것을 열심히 평가하고 있는 셈이다.
같은 연구진이 스스로 밝힌 한계도 눈여겨볼 만하다. 자기들이 쓴 직업 분류 데이터는 실제 일에 필요한 사람 사이의 판단, 분야 전문성, 윤리적 고려를 담아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측정 도구가 못 보는 바로 그 영역이, 앞으로 사람에게 남는 영역이다.
그래서 AI는 측정할 수 있는 것과 실제로 살펴봐야 하는 것을 서로 반대편으로 밀어낸다. 평가하는 능력이 좋아질수록 엉뚱한 것을 정밀하게 측정하게 되는 구조다.
금지선은 이미 그어졌고, 안전장치는 미뤄졌다
규제 상황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EU에 직원을 두고 있다면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EU AI Act는 직장에서 AI로 직원의 감정을 읽어내는 행위를 금지한다. 의료나 안전 목적이라는 좁은 예외만 있다. 이 조항은 2025년 2월 2일부터 이미 시행 중이고, 어기면 과징금이 최대 3,500만 유로 또는 전 세계 매출의 7% 중 높은 쪽이다. 직원이 어디서 일하느냐로 판단한다.
다만 금지 범위에는 분명한 선이 있다. 몸에서 읽어내는 것만 금지된다. 얼굴 표정, 목소리, 자세, 타이핑 리듬 같은 것들이다. 반면 글에서 감정을 읽는 건 여기 해당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 업무 메신저의 말투를 분석하는 건 이 조항에 걸리지 않는다.
한편 채용과 성과 관리에 쓰이는 AI를 규제하는 조항들 — 위험 평가, 사람의 감독, 편향 검증 의무 — 은 일정이 밀렸다. 원래 2026년 8월 2일부터 적용될 예정이었지만, 개정으로 2027년 12월 2일로 넘어갔다. 이 개정안은 2026년 6월 EU 의회와 이사회를 통과했다.
정리하면 지금은 이런 상태다. 가장 노골적인 방식은 막혔지만, 나머지를 다룰 안전장치는 1년 반 뒤로 미뤄졌다.
AI를 코치로 쓰면 되지 않을까: 아직 답이 갈린다
그럼 AI를 감시가 아니라 코칭에 쓰면 되지 않을까. 방향은 맞다. 다만 근거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2022년 PLOS ONE에 실린 연구는 AI 챗봇 코치가 목표 달성에서 인간 코치만큼 효과적이었다고 보고했다. 자주 인용되는 결과다. 그런데 2026년에 나온 후속 실험에서는 다른 결과가 나왔다. 인증받은 코치와 AI 코치를 직접 비교했더니, 인간 코칭에서만 뚜렷한 효과가 나타났다.
그러니 지금 정직한 요약은 이렇다. AI 코칭이 인간 코칭을 대신할 수 있다는 주장은 아직 근거가 갈린다. 시중에 도는 수치들은 대부분 판매자가 낸 자료이니 그대로 믿지 않는 게 좋다.
그렇다고 AI가 쓸모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판정에 쓰는 것보다 성장에 쓰는 쪽이 덜 위험하다 정도로 잡아두는 게 지금 근거 수준에 맞다. 잘못된 코칭 제안은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잘못된 판정은 사람의 커리어를 바꾼다.
그래서 무엇을 정해야 하나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다. 같은 데이터도 어디로 흘러가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물건이 된다. 3편의 카카오 사례에서 본 것과 똑같은 원리다.
회사가 지금 정해야 할 건 하나다.
모아둔 데이터가 본인에게 먼저 가는가, 관리자에게 먼저 가는가.
본인에게 먼저 가면 도구다. 관리자에게 먼저 가면 감시다. 기술은 똑같고, 갈리는 건 방향뿐이다.
다음 편에서는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스타트업 규모 회사에서 실제로 어떻게 굴릴지 다룬다. 등급표 없이 성과를 관리하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 주니어를 위한 한 문단
AI 시대에 뭘 준비해야 하냐고 물으면 흔히 소프트 스킬을 키우라고 한다. 맞는 말이지만 너무 막연하다.
조금 더 써먹을 만한 기준이 있다. 로그에 안 남는 일을 늘려가는 것.
문서를 몇 개 썼고 티켓을 몇 개 닫았는지는 앞으로 점점 덜 중요해진다. 반면 왜 그 방향을 골랐는지, 막힌 동료를 어떻게 풀어줬는지, 이상한 요구사항을 어떻게 되돌려놨는지는 어떤 대시보드에도 안 잡힌다.
그러니 그런 일은 본인이 적어두는 게 좋다. 시스템이 대신 남겨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 기록이 몇 년 뒤 자기 커리어를 설명할 때 가장 값어치 있는 자산이 된다.
퍼플즈 노트
퍼플즈도 데이터를 다루는 서비스다. 그러니 우리는 예외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같은 기준을 스스로에게 대보는 편이 맞다.
이 편에서 세운 기준은 두 가지였다. 데이터가 본인에게서 나오는가. 그리고 판정이 아니라 다음 시도로 흘러가는가.
퍼플즈에 쌓이는 건 몰래 모은 활동 기록이 아니라, 프로젝트에 직접 남긴 피드와, 프로젝트를 마친 사람이 직접 남긴 피드백이다. 그리고 그 기록은 등급이 되어 누군가에게 통보되는 대신, 다음에 누구와 일하면 좋을지 가늠하는 재료로 쓰인다.
AI를 사람을 평가하는 데 쓸 것인가, 잇는 데 쓸 것인가. 퍼플즈는 후자를 택했다.
참고 출처
EU AI Act Regulation (EU) 2024/1689, Article 5(1)(f) / European Commission, Guidelines on prohibited AI practices (2025.2.4)
Digital Omnibus on AI — EU 의회·이사회 통과 (2026.6)
Tomlinson et al., "Working with AI: Measuring the Applicability of Generative AI to Occupations", Microsoft Research (2025)
Washington Center for Equitable Growth — 자동화 관리·감시 기술과 노동자 웰빙 (2024.11)
Terblanche et al., PLOS ONE (2022) / de Haan, Terblanche & Nowack, Human Resource Development International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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