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일은 많은데, 과정을 기록하는 건 왜 이렇게 어려울까

실패만 적었는데 천재가 됐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폴리매스(polymath, 다재다능, 올라운더 등등)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중에서도 그의 특기를 고르자면, 모나리자를 그려낸 예술적인 기술이나 정교하게 설계된 비행기가 아닌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천재가 남긴 기록은 어딘지 거창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와 다르다. 성공보다는 실패에 대한 내용이 가득 적혀 있기 때문이다. 작동하지 않은 설계, 폐기된 가설. 거기다 그 기록들마저도 정리되지 않았다. 같은 종이에 바늘 기계와 용 두 마리를 그린 잉크는 고르지 않게 바래 있어 한 페이지에 여러 개의 시간대가 공존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다빈치는 그가 만든 것이 아니라 헤맨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약 1만 3천여 페이지의 노트를 남겼다. 이 노트에 적힌 내용들은 완성품으로 우리 시대에 남겨져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청동 기마상은 끝내 주물에 붓지 못했고, 그가 설계한 비행 기계 중 하늘에 뜬 것은 하나도 없다. 그에게 의뢰를 맡겼던 사람들은 분노했고, 계약은 파기됐고, 작품은 미완으로 남았다. 우리가 결과로 사람을 평가한다고 믿지만, 다빈치를 천재로 만든 건 그가 완성해낸 결과가 아니다.
기록이 공짜가 된 시대
다빈치를 비롯해 과거의 기록은 사치였다. 한 권의 책을 베끼는 데 수도사의 몇 달이라는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 양피지를 긁어내 다시 쓸 정도로, 그 시대에 과정을 남긴다는 건 막대한 비용이었다. 그렇다 보니 '기록을 남기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현대는 정반대다. 모든 키 입력이 자동으로 저장되고, 모든 버전이 클라우드에 쌓이고, 메모는 무한히 공짜다. 논리대로라면 지금은 모두가 다빈치인 시대여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한 일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데, 그 과정을 적으라고 하면 다들 빈 페이지 앞에서 멈춘다. 기록이 가장 쉬워진 시대에, 과정은 가장 빈약하다. 어떻게 결론에 도달했는지 정리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그래서 다들 다빈치가 됐냐면, 아니다
오래 참고가 되는 기록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사건과 기록 사이에 시간이 있었다. 매일 배 위에서 적는 항해일지가 의미를 갖게 되는 건 항구로 돌아와 펼쳐볼 때, 또는 다음 항해를 준비할 때다. 폭풍 한가운데서 열어보는 기록이 아니라, 폭풍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무엇이 중요했는지가 보인다. 회의록도, 옛 문헌도 대개 한복판이 아니라 한 박자 뒤에서 정리되었다. 기록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거리의 문제다. 사건과의 거리가 있으면 적혔고, 없으면 적히기 어려웠다.
거리가 0이 된 시대
AI와 일하다 보면 며칠씩 걸리던 일이 3분 만에 끝나는 경험을 누구나 한다. 사고와 검토를 AI가 사람을 대신하고 있는 현대를 생각해보면, 사건과 기록의 거리가 0이 됐다. 없음의 0이 아니라 한 호흡 안으로 응축됐다고 보는 게 맞다. 어디가 틀렸는지 알아채고, 무엇을 선택할지 고르는 일이 전부 그 호흡 안에 겹쳐 있다. 밀도는 더 높아졌는데, 펼쳐 적을 시간이 사라졌다.
AI 때문에(또는 덕분에) 사건과 기록의 거리가 사라지자 더 고약한 일이 벌어진다. 결과물이 확정되지 않고 업그레이드된다. 프롬프트 하나로 통째로 다른 결과에 도달하기도 한다. 고정적이었던 결과의 의미가 이제는 잠정적이고 유동적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결과물의 변화가 곧 기록으로 남겨진다. 개발자라면 git의 diff를 바로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기록한다는 건 '이게 확정이다'라고 한 순간을 못 박는 일이다. 지금 버전을 기록하려는 순간, 머릿속 과정은 이미 '현재 결과물의 다음 버전'을 생각하고 있다. 기록하느니 다음 버전을 작업하고 싶은 본능에 휩싸인다. 과정을 기록하는 일은 흐르는 물을 포착하는 일만큼이나 점점 어려워진다. 빈 페이지 앞에서 막히는 건 정리를 못 해서가 아니다. 기록할 대상이 손에 잡히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천재는 답이 아니라 헤맴을 남겼다
다빈치가 현대에도 존재한다면, 그도 과정을 기록하는 걸 우리처럼 어려워했을까? 사실 그는 결과를 얻어내기 위하여 과정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에게 일의 목적은 완성이 아닌 이해였다. 비행 기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 비행을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결과에 도달해도 멈추지 않았다. 결과는 종착점이 아니라 다음 질문의 출발점이었다.
결국 과정을 기록한다는 건, 이해하려는 노력의 다른 이름이다. 다빈치의 노트가 천재의 발자취로 남은 건 정답을 적어서가 아니라, 이해하려 헤맨 흔적을 적었기 때문이다. 1만 3천 페이지는 답이 아니라 헤맴이었다.
우리는 그 헤맴을 건너뛸 수 있는 첫 세대다. AI에게 맡기면 이해하지 않고도 다음으로 갈 수 있다. 건너뛰어도 일은 굴러가고, 결과는 나온다. 다만 한 가지가 남지 않는다. 결과는 손에 쥐어지는데, 그걸 만든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이해를 건너뛴 자리에는 '나'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탈 줄 아는 것과 그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 다르듯, 내가 정말 이해했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원래 수고롭다. 그러나 그 수고로움이 싫어 건너뛰면, 결과는 남아도 그것을 만든 '나'는 남지 않는다.
완성이 아니라 이해를 좇았던 다빈치. 그조차도 그 과정을 남기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 기억 속에 다빈치는 없다. 그를 천재로 만든 건 비행 기계가 아니라, 비행을 이해하려 헤맨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 하나다. 우리가 어렵고 다소 귀찮아서 건너뛰는 그 과정이야말로,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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